7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장시간 노동과 사내 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장실습생 김동준 군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해, 산업재해로 세상을 뜨고 나서야 겨우 보이는 청(소)년 노동자, 그리고 대학입시 중심의 교육에서 보이지 않게 된 특성화고 학생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 독서 감상문 소속 : 상대원푸른학교 지역아동센터 이름 : 이정은 책이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저자 은유 출판사돌베게 감상평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아이이의 죽음. cj진천 소세지 공장 이야기라 놀랐다. 예전에 cj 이천 공장이 소세지, 햄 공장이었는데 13년 전에 불이 나서 진천 공장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고 있다. 2002년 난 전문대학 식품과를 졸업도 하기 전 cj 공장 분석실로 취업을 했었다. 매일 출시되는 제품에 대한 미생물 검사를 하는 일이었는데 그때 공장도 전문대학 임상병리과나 식품과를 졸업한 졸업생을 분석실에 투입해 역량을 전문화 시키자는 것이 공장의 지침이었다. 그 당시 취업을 하고 보니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공장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분석실과 생산라인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장이 시내가 아닌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어 80%가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나름 반복되는 단순 노동일을 열심히 하였고 동기들끼리의 모임이 잘 조성되고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2교대로 진행되는 고된 노동에 지쳐있긴 했었지만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등급이 다르긴 했지만 cj직원으로 소속되어 월급이 꾸준히 나온다는 것에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부모들도 “네가 어디 가서 취업하겠니? cj 제일제당이면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데” 식의 인식이 있어서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모두들 같이 모여 시내로 가서 술을 마시고 기숙사에서 자고 난후 아침이 되면 다시 일을 하였다. 그것도 주간에 일할 경우에만 가능했고 저녁 조는 24시간을 공장에서 보내야만 했다. 취업생들 중 공장을 오래 다...

앗싸! 통일학교로 가자

앗싸! 통일학교로 가자 장인수(검단초 3년)오늘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통일이 되어서 재미있는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났다. 내가 마치 에 나오는 엘리스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초고속 전철을 타고 통일학교로 갔다. 내가 빨간 스카프를 하고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이 북한말이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수학책을 다 못 풀었다. 그렇지만 검단초에 다닐 때보다 선생님이 혼내지는 않았다. 대신 장기자랑을 시켰다. 북한 친구들이 좋아했다. 몇몇 북한 친구들이 나를 놀릴 때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단발머리에 바지를 입고 남자 같았지만 목소리도 예쁘고 친절했다. 급식으로는 평양냉면과 개성만두가 나왔다. 친구들은 좋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난 평양냉면이 먹고 싶지 않았다. 맛은 얼음 한 웅큼에다가 면 한 주먹 넣은 맛이었다. 개성만두는 맛있었다. 통일학교에서 체험학습도 갔다. 체험학습이 제일 인상적이다. 체험학습 장소는 백두산이다. 가는 길에는 백두산 호랑이를 만났다. 친구들과 백두산 호랑이 등을 타고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남한 친구가 한라산 호랑이를 타고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남한 호랑이와 북한 호랑이를 짝짓기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상상력이 참 기발하다. 엉뚱한 친구이기도 하다. 남한 호랑이와 북한 호랑이가 짝짓기 해서 새끼가 태어나면 이름은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벌써 호랑이가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호랑이의 짝짓기하는 모습은 호랑이를 데리고 온 친구의 모습보다 더 신기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말이나 소는 "이랴!"하면 가는데 호랑이는 뭐라 해야지 갈까?백두산 정상에서는 군인 놀이를 했다....

짱짱한 장인수를 꿈꾸며

짱짱한 장인수를 꿈꾸며 기호 2번, 장인수! 기호 2번, 장인수! 또 선거운동 배틀이 시작됐다. 아침에 친구들과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6교시까지 수업을 받고 나니 짜자잔, 드디어 개표시간이 되었다. 온몸이 떨려왔다. 바이킹을 탔는데 바이킹이 높이 올라가려 할 때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맴돌 때 드디어 결과발표. “전교부회장은, 기호 2번....장.인.수!!!” 다른 친구들의 찌그러지는 얼굴. 월드컵에서 골을 넣으면 이런 기분이랄까,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세계적인 축구선수 메시처럼 세리머니를 했다. 목소리가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설레임. 기분이 좋아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자기란 쉽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등교하는데 4학년 동생 주영이와 같은 반 여자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형, 부회장 된 것 축하해. 그런데 야구부는 언제 개설 할 거야. 야 장인수 댄스부는 언제 생기니? 너 무조건 부회장 되려고 허위 공약 한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회장 후보 공약 중에 1.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리기 2.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 활동 개설 3. 야구부, 방송댄스부 만들기 4. 학교 위생문제 집중관리하기 이렇게 4가지 였는데 남자 아이들은 야구부에 여자 방송댄스부 개설에 생각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아, 여자 아이들을 응원했던 상대편 여자 아이들도 나를 약올리듯이 너가 어떻게 야구부와 방송 댄스부를 만들건데 하는 눈빛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뉴스를 보니 국민들과의 약속을 못 지키고 정치인들이 조사를 받으러 검찰로 끌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정치인들도 처음에 당선 될 때는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국민들에게 욕을 먹는 것을 보니 나도 내가 지키기에 너무 큰 공약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남자 아이들은 야구를 제일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은 춤추는 것을 제일 좋아해서 이런 공약을 발표했다. 그런데 막상 부회장이 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

통일 아리랑 글 제출- 대한민국, 자주적인 나라로 우뚝 서다

대한민국, 자주적인 나라로 우뚝 서다 이번에 4대궁 체험이라는 것을 하면서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아픈 한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궁에 얽힌 역사공부를 하면서 꼭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창경궁에 갔을 때 가이드선생님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좁은 곳에서 갖혀있었다고 하니 정말 끔찍했다. 거기다 일제 강점기 때 창경궁이 동,식물원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약 지금까지 동물원으로 있었으면 지금까지도 창경궁에서 벌어진 우리나라의 역사이야기를 잘 모를 것이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많이 불타고,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간 곳 덕수궁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헤이그 특사사건도 벌어졌다. 이렇듯 궁을 둘러보다 보면다른 나라의 간섭도 많이 받고, 정복당하고, 굴복하는 슬픈 역사가 많은 것 같다. 우리 궁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일본의 탄압을 받아와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되었다. 지금까지도 일본에게 사과를 못 받고 있고, 미국에게까지 간섭을 많이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일을 원치 않으면서 걷으로 우호적인 입장만 취하는 것 같다. 통일이 되면 남한의 대통령 1명과 북한의 대통령 1명을 뽑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남과 북은 반 세기 동안 서로 다른 나라였으니 한 번에 대통령을 통합하려하면 분명히 권력 다툼은 물론 많은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6.25 전쟁의 아픈 역사를 떠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2차 6.25전쟁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통치자가 2명이 되면 좋은 점은 서로 문화를 나누면서 어떻게 해야 다시 한 민족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어떻게 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을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북한의 자원을 합쳐서 여러 기계를 수출하는 것이다. 통치자는 우리나라의 영토인 독도를 지킨 안용복같이 우리나라를 자주적으로 굳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6학년을 마치며-장인수

검단초등학교에서 보낸 시간들을 가슴에 품고 떠나며…… 6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매우 즐거웠다.”이다. 1학년부터 각 학년별 학예회, 2년마다 열린 운동회, 스포츠 클럽데이, 학급별 회장 선거, 알뜰장터, 밤을 못 새워서 아쉽기는 하지만 신나는 수학여행까지 수많은 추억들이 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다. 한편으로는 한번뿐인 초등학교 시절인데 좀 더 실컷 놀지 못해 아쉽다. 솔직히 1년만 더 놀고 중학교에 가고 싶다. 중학생이 되어 과연 잘 할 수 있을지는 걱정된다.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도 실감이 잘 안 난다. 도서실, 방송실, 과학실, 내가 1년씩 생활해온 교실까지 정들지 않은 곳이 없다. 6년 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들 그리고 담임선생님들까지 다 기억이 생생하다. 검단초등학교에서 친구들 간에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양보하는 방법, 기초 예절까지 배우며 내가 많이 성장한 것 같다. 친구와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들이 모두 소중했던 것 같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친구들과 헤어지지만 우리 모두 검단초등학교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 중 한 부분만큼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하고 지냈으면 좋겠다. 검단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졸업을 해서 검단초등학교 정문을 나가는 길이 초등학교의 끝이지만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검단 졸업생들 모두 파이팅이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검단초등학교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엄마 잔소리 검단초등학교 3학년 2반 장 희 수 이른 아침부터 시끌 시끌 엄마 잔소리 일어나라 옷 입어라 세수해라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 핸드폰으로 들려오는 엄마 잔소리 손 씻어라 게임 하지 말아라 숙제해라 피아노 학원 가라 하지만 저녁 7시만 되면 그리운 엄마 목소리 나는 핸드폰을 들고 잔소리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